의사 안상호 생애와 친일 논란 재조명 — 기록으로 보는 전말

 





1. 생애 연표


연도사건
1872화가 안건영의 아들로 서울 출생
-관립일어학교 제1회 졸업
-조선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1902.06일본 도쿄자혜의원의학교 졸업, 한국인 최초 일본 의사 자격증 취득
1904대한제국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 (귀국하지 않음)
1905.01귀국 지연으로 교관 직위 해제
1907귀국, 서울 종로3가에 개인 진료소 개원 (한국 최초 서양식 개인 병원)
-순종의 전의로 활동, 지석영 설립 의학교 등에서 서양의학 강의
1916.11.29친일 단체 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 취임
1918.12.10매일신보, '전연히 내지화한 의사 안상호 씨의 가정' 보도
1919고종 뇌출혈 당시 일본인 의사와 함께 진료 참여 (독살 관여 의혹 제기됨, 미확인)
1927사망

2. 대정실업친목회란 어떤 단체였나

1916년 12월 경성에서 자작 조중응, 백작 이완용, 송병준을 중심으로 결성된 경제인 단체로, 전성기 회원 규모는 약 250명이었습니다. 회원은 조선인 전직 관료,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1921년 1월 대회에서 기구를 개편한 이후 확인 가능한 임원진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 회장: 민영기
  • 부회장: 조진태
  • 이사: 예종석 외 14명
  • 평의원: 백완혁 외 27명 (안상호가 여기 포함되는 것으로 보임)
  • 평의장: 한상룡
  • 고문: 이완용, 민영휘, 이윤용

즉 안상호는 약 250명 전체 회원 중, 조직 운영에 관여하는 평의원(약 28명 규모) 직책에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250명 회원 전체의 실명 명단이 하나로 정리되어 공개된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위에 정리한 이름들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록된 임원진(회장·부회장·이사·평의원·평의장·고문)에 한정된 것이며, 일반 회원 명단까지는 공개돼 있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의 '일선 융화(내선융화)' 정책을 선전하는 데 이용된 조직으로 평가됩니다. 안상호가 이 단체의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2007년 이정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최초의 근대 개업의 안상호의 생애와 활동'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1918년 매일신보 인터뷰 원문

1918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 '전연히 내지화한 의사 안상호 씨의 가정'은 영친왕(왕세자)의 가례를 앞두고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을 이룬 가정'을 소개한다는 취지로 기획됐습니다.

기사는 안상호를 "조선에서 가장 먼저 서양 의학을 배워온 의사"이자 "일본인과 조선인이 화합하는 가정을 꾸리는 데도 가장 먼저 성공의 깃발을 든 인물"로 소개하며, 8~9년 전 도쿄 출신 일본인 여성 '이소(磯)'와 결혼했다고 전합니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안상호 본인의 인터뷰 발언입니다.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은 조금도 못 먹는다. 오남매의 자녀들은 집에서 전적으로 일본어만 사용하며,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일이 없다."

이 발언은 단순한 생활양식 묘사를 넘어, 조선어 단절과 조선인과의 관계 단절까지 스스로 밝혔다는 점에서 이후 '친일 논란'의 핵심 근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는 안상호 부부와 자녀들의 가족사진도 함께 실렸습니다. 원문은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nl.go.kr/newspaper)에서 "안상호"로 검색하면 열람할 수 있습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4. 죽음, 그리고 안양의 송덕비

안상호는 1927년 12월 31일 밤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1928년 1월 5일 매일신보는 '내선가정의 성공자, 의사 안상호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부고를 실었습니다.

이 부고 기사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안상호에게 안양 지역에 송덕비가 있었다는 언급입니다. 친일 논란과는 별개로 지역 사회 일각에서는 그의 의료 활동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웠다는 뜻입니다.

친일 행적과 지역민의 감사 표시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는 점은, 안상호를 단순히 '친일파'로만 규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는 그의 친일 행적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는 아니며, 별개의 사실로 함께 기록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5. 정반대의 길 — 김익남과의 비교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안상호와 대비되는 인물로 김익남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김익남은 1899년 7월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 1900년 8월 귀국해 의학교 교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안상호와 달리 귀국 요청에 즉시 응했고, 이후의 행보에서도 친일 논란과는 거리를 둔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근대 의학을 배운 조선인 의사였지만, 이후 걸어간 길은 뚜렷하게 갈렸습니다.


6. 그럼에도 '공식 친일파'는 아닌 이유

안상호는 다음 어느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 있지 않습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 친일파 708인 명단
  • 친일인명사전

공식 지정 기준(고위 관직, 군사·경찰 협력, 명시적 매국 행위 등)에는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되나, 학계에서는 그의 행적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습니다.


7. 정리하며

안상호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인 병원을 연 근대 의료사의 인물입니다. 동시에 친일 단체 평의원 활동과 총독부의 동화 정책 선전에 활용된 가정사라는, 공식 명단에는 없지만 뚜렷한 친일 행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번 논란은 '역사적 인물 재평가'가 얼마나 복합적인 자료 검토를 필요로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이정은, '최초의 근대 개업의 안상호의 생애와 활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매일신보 1918.12.10, 1928.1.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련 언론 보도(코리아데일리, 아시아경제, 한국일보, 코리아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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